"죽기 싫으면 결혼하세요."
황실 서기관이 양피지를 내밀며 건넨 말은, 청혼치고는 지나치게 사무적이었다.
엘리아나 로즈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서명했다.
***
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.
북부로 향하는 마차 안. 엘리아나는 손난로도 없이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멍하니 밖을 보았다.
발레리안 제국의 수도를 벗어난 지 사흘째. 풍경은 이미 잿빛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.
침엽수들이 무겁게 눈을 이고 서 있었고, 길 위에는 마차 바퀴 자국 외에 생명체의 흔적조차 없었다.
'좋아. 정리해보자.'
연분홍빛 머리카락이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찬바람에 흔들렸다. 보라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.
'나는 지금 소설 속 악녀에 빙의했다. 이 몸의 원래 주인은 1년 뒤 마수 독에 중독돼 피 토하며 죽는 운명이었지.'
그 데드엔딩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북부대공과의 계약결혼이다.
목표는 단 하나.
1년만 버티고, 위자료를 두둑하게 챙겨서, 따뜻한 남부 휴양지에서 여생을 즐기는 것.
단순하고 명쾌한 계획이었다.
문제는, 북부대공 칼릭스 윈터펠이 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이라는 점뿐.
***
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춰 섰다.
엘리아나가 커튼을 걷자, 저 멀리 거대한 검은 철문이 보였다. 윈터펠 대공성의 정문이었다.
높이가 족히 십 미터는 될 법한 철문 위에는 늑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.
눈이 쌓인 탓에 늑대의 눈 부분만 날카롭게 드러나 있었는데, 마치 침입자를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다.
"……무섭게도 생겼네."
마차 문이 열리자 날 선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.
엘리아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발을 내디뎠다. 얇은 구두 밑창으로 눈이 밟혔다. 발가락 끝이 즉시 얼어붙는 감각에 몸이 떨렸다.
'남부에선 이 계절에 꽃이 핀다는데. 여긴 지옥이 따로 없군.'
정문 앞에는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. 모두 검은 갑옷 차림에 굳은 표정이었다.
그 한가운데, 한 남자가 서 있었다.
키가 컸다. 그게 첫인상이었다.
엘리아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데다 어깨가 넓어,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정문의 풍경이 압도당하는 듯했다.
칼릭스 윈터펠. 북부를 홀로 지탱한다는 대공.
